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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프리철수리 실제 사건 - 한인 청년 이철수의 누명

by 호시리오 2023. 9.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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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개봉하는 다큐멘터리 프리철수리는, 제목 그대로 한인 청년 이철수씨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힌 뒤, 자유를 되찾기까지의 10년의 시간과 과정을 다규멘터리 형식으로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이 운동은 당시 한 개인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주는 사회적 연대를 넘어 당시 철저하게 미국사회에서 비주류로 외면 받았던 이들의 인종차별에 대한 항거로서의 의미 또한 가지고 있습니다.

누명을 쓴 20살의 한국인 청년에 대한 이야기

이 이야기는 무려 50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1973년에 시작된 사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미국으로 이민을 간 이민자들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그 중에서도 아직은 그 세력이 크지 않았던 동양인, 그 중에서도 한국이민자에 대한 이야기이며, 한 청년의 억울한 청년에 대한 이야기기이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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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이야기는 미국 내에서 이렇다할 힘을 갖추지 못했던 아시아계의 어린 청년에서 시작하여 미국이민자들 중 소외를 받던 집단 중 하나인 아시아계 이민자들의 연합과 연대를 이끌어내는 의도하지 않았던 사회적 변화를 이끌어내는 사건으로 기록되면서 미국내 아시아계의 역사에서 매우 의미있는 사건이 됩니다. 실제 이 사건은 어떤 과정으로 진행되었을까요?

 

엄미와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간 소년 이철수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이철수씨는 1952년 서울에서 출생하였습니다. 그의 출생 후 그의 어머니는 미군과 결혼하게 되어 미국으로 떠났다가 그가 12살이 되던 해 그와 함께 미국에서 함꼐 살아가기 위해 돌아와 1964년 미국으로 이주하게 됩니다. 미국 이주 후 그는 어린 나이에 미국생활에 온전하게 적응하는 것에 실패하며 정신적으로 꽤 힘든 시간을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965년 청소년 정신분열 진단을 받고 한동안 'Juvenile Hall'에 수용되게 됩니다. 그는 Juvenile Hall'에 수용되어있던 이 기간동안 자살시도를 한 후 'McAuley Institute at St. Mary's Medical Center'로 옮겨지게 되고 이후에는 1966 3 나파 주립 병원에 3개월 동안 입원한 완치판정을 받고 헤이우드에 있는 위탁가정으로 옮겨져 생활하였습니다.

 

하지만 같은 해 10월 이 위탁가정에서 달아났다가 체포되어 1967년 여름부터 13개월동안 구금시설과 정신병원등에서 지내게 됩니다. 이후에도 절도나 기타 다양한 범죄등을 일으키면서 1971년 12월에 체포, 1972년 1월 180일형을 선고받고 1972년 1월부터는 보호관찰 3년의 형을 선고받아아 이 보호관찰이 1972년 6월 5일에 시작됩니다. 이 시기 그는 샌프란시스코의 차이나타운 등지에서 생활하고 있었고, 이 지역의 아시아인들은 대부분 중국인이었습니다.

✻ Juvenile Hall
우리나라의 소년원과 유사한 일종의 수용시설로 13세 이상의 청소년이 범죄를 저질렀을 때 수용하게 되는 시설입니다.
✻ Foster Home
우리나라의 위탁가정에 해당하는 가정으로 부모와 함께 생활할 수 없는 환경의 청소년들을 위한 임시보호시설에 해당합니다. 미국에서는 이 위탁가정이 단순히 보호가 필요한 청소년들에게 보호를 제공하기 위한 목적으로만 활용되는 것이 아니라 청소년 범죄자가 가정으로 돌어가 다시 범죄를 저지르지 않을 수 있는 적절한 케어를 받을 수 없는 경우 이를 방지하기 위한 목적으로도 이용되고 있습니다.

 

청년, 누명을 쓰다.

1. 누군가가 죽었다.

그가 보호관찰을 받고 있던 1973년 그는 샌프란시스코의 차이나타운 갱단의 일원 중 한 명인 'Yip Yee Tak'을 살해했다는 혐의로 체포됩니다. 당시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는 꽤 많은 수의 청소년 혹은 청년들로 구성된 젊은 갱 집단들이 있었는데 그 중 Wah Ching 과 Joe Boys라는 조직이 대립중에 있었습니다.

 

'Yip Yee Tak'은 이 중 Wah Ching의 일원으로 청년집단의 일종의 우두머리급 구성원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목격자에 따르면 범인은 1973년 6월 3일 저녁  'Yip Yee Tak'을 총격한 후 이내 달아났고, 이후 경찰은 오후 8시 10분쯤 현장에 출동하여 유력용의자들을 체포하게 됩니다.경찰은 현장에서 범인이 사용한 총의 사용된 탄피 5개를 수거하였고, 추가로 38구경 리볼버를 거리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2. 5명의 목격자, 발견된 총알

사건 직후 경찰은 이 사건의 총격을 목격한 3명의 목격자와 이후 이 거리에서 어디론가 도망가는 듯 거리에서 사라지는 남자를 목격한 2명의 목격자들의 증언으로 이철수씨를 범인으로 지목하게 됩니다. 이들의 범인에 대한 지목은 경찰들이 보유한 전과자들의 머그샷을 통해 이루어졌고, 이 당시 증언한 목격자들은 모두 백인 남성이었습니다.

 

당시 이 목격자들이 선택한 이철수씨의 머그샷은 1969년 당시 촬영된 것으로 해당 사건이 일어난 1973년에서 4년이 흐른 사진이었으며 1969년 당시 그의 나이는 17세였습니다. 다시 말해 목격자들은 17세의 이철수씨의 모습을 보고 사건당시 21세였던 이철수씨를 지목한 것이 됩니다. 

 

수사가 진행되면서  'Yip Yee Tak'의 부검을 통해  'Yip Yee Tak'의 몸속에서 38구경의 총알이 발견되고 이후 경찰들이 회수했던 38구경 권총이 해당 사건의 범행도구로 밝혀집니다. 

 

이 과정에서 몇가지 불운한 우연들이 겹치는 과정이 펼쳐지게 됩니다.

 'Yip Yee Tak'의 살인사건 바로 전날 경찰들이 이철수씨의 아파트에서 발생한 총격사건으로 인해 이 곳을 방문한 일이 있었는데 이 당시 그의 아파트 창문쪽의 벽에서 총알을 제거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사건의 바로 전날 벌어졌던 이 일로 인해 이철수씨가 용의자 선상에 오르게 되었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결국 6월 7일 오후 경찰은 이철수씨를 체포하게 되고, 체포 당시 이철수씨는 콜트파이썬 357 리볼버를 소지하고 있었고 주머니에 38구경의 총알 41개가 발견됩니다.

 

3. 범인이 된 후.

6월 11일 목격자들의 증언과 이전 사건에서 회수된 총알등의 관련 증거로 인해 (이후에는 관련이 없는 것으로 밝혀진) 이철수씨는 용의자로 지목되고, 이후 여러 결백을 주장할 수 있는 반대증거에도 불구하고 이전에 벌였던 몇건의 강도사건이나 의심의 가능성이 있는 몇가지 사소한 증거품으로 인해 당사자의 부인과 결백의 주장은 힘을 얻지 못하고 최종적으로 7월 10일 종신형 선고를 받은 후 1975년 4월 30일 확정선고를 받게 됩니다. 

 

이후에는 수감생활을 하던 중 1977년 10월 8일 교도소 내에서 모리슨 니덤과 약간의 말다툼 끝에 그를 살해하게 되는데 이 당시에도 이씨는 정당방위를 주장하게 되지만 이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이전 유죄판결을 받은 살인 사건으로 인해 특수 살인 혐의로 기소 사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4. 재심의 시작

그대로 묻힐 뻔한 이 사건은 한국인 기자 이경원씨의 조사로 다시 세상에 드러나게 됩니다.

그의 결백을 믿고 있던 일부 아시아계 미국인들을 지지하는 사람들로부터 해당 사건에 대한 여러 정보들을 듣게 된 이경원 기자는 1977년 6월부터 대략 6개월의 시간동안 다양한 측면의 조사를 하게 되고 이 사건에서 누락된 여러 증거와 정보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경원 기자는 이 사건에 대해 두 개의 기사를 쓰게 되는데 그 중 첫번쨰 기사는 1978년 1월에 세크라멘트 유니언에 게제되고, 이 기사로 이철수씨가 종신형을 받게 된 Yip Yee Tak살인사건에 대한 의문을 제기합니다. 

 

이후 이철수씨를 구제하기 위한 변호사비 자금을 모으기 위한 모금운동이 펼쳐지게 되고 새로 조직된 이철수씨의 변호인단은 주요증거의 은폐들을 이유로 하여 재심을 청구하게 되고 1982년 8월 11일 재심이 시작되었으며 9월 3일 첫번째 살인사건인 Yip Yee Tak사건에 대한 무죄가 선고됩니다.

 

1983년 1월 14일에는 두 번째 살인사건에 대해서도 무죄가 내려지면서 1983년 3월 28일 $236,262의 가석방을 위한 보석금을 내고 자석방이 됩니다. 검찰은 이에 두번쨰 살인에 대한 재심을 다시 신청했으나 이에 대해서는 이후 이철수씨가 이미 10년의 수감생활을 한 것으로 해당 사건에 대한 복역기간이 인정되어 비로소 완전한 자유가 됩니다.

 

5. 한인들의 분노.

50년전 발생한 이철수씨의 억울학 옥살이와 그에 대한 한인사히의 구명운동은 오랜 시간 미국사회에서 억눌려 온 아시아계 비주류 소수민족의 억울함이 폭발한 사건으로 내내 회자되고 있습니다. 한국인들은 오랜시간동안 미국 백인들에게 눌려온 인종차별에 대한 분노와 억울함을 이철수씨 사건으로 인해 분출하였고 이철수씨의 사건에 여러 동질감을 느끼게 되어 그를 구명하는 사회적 운동으로 변화하는 연대의 기록으로 남기게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문제는 5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이런 인종차별적인 대우나 불합리한 처우는 여전하며 오히려 표면적으로 더 커진듯한 인상을 준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것이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지금 이 다큐멘터리가 주목을 받고 있는 이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6. 영화 프리철수리..

다큐멘터리 영화 프리철수리는 하줄리, 이성민 감독의 공동연출 작품으로 2023년 11월 개봉예정입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이철수씨는 불행히도 잘못된 판결에 대한 국가적 배상을 별도로 받지는 못했습니다.

이후 몇몇 사건으로 인해 다시 유죄를 선고받고 집행유예를 받는 등의 문제가 있었지만 청소년들을 위한 강연과 아시아계 커뮤니티의 중요성등을 알리는 활동을 하다 2014년 사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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