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일어난 대한민국 대사관 2급 서기관 도재승 피랍사건에 대한 영화가 하반기 준비되고 있습니다. 영화를 보기 전 영화 피랍 실화 사건인 1986년 레바논 외교관 피랍사건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0. 영화의 제목은 피랍에서 비공식작전으로 변경
당초 피랍이라는 제목으로 준비되고 있던 해당 영화는 개봉을 앞두고 비공식작전이라는 제목으로 영화 제목을 바꾸어 개봉을 앞두고 있습니다. 실제 일어난 사건 자체가 굉장히 드라마틱하기 때문에 실제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사건에 대해 조금 자세하게 알아보고 싶은 분들을 위한 실제 레바논 베이루트 외교관 납치 사건에 대한 정보를 정리해보았습니다.
1. 사건개요
1986년 1월 31일 한국시간으로는 오후 3시 10분, 현지 시간으로는 오전 8시 10분에 레바논 베이루트의 한국 공관에서 근무하고 하던 2급 서시관 도재승 서기관이 함께 공관에서 근무하던 김규영 행정관의 공관 승용차로 출근을 하다가 공관 앞 25m 지점 길에서 무장을 한 복면괴한 4명에 의해 납치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사건이 벌어지자마자 당시 주 레바논 대사는 당일 저녁 당시 레바논의 수상 겸 외상이었던 카라미를 예방하여 해당 사건의 해결에 레바논 정부의 도움을 요청합니다. 당시 도 서기관을 납치했던 인물들은 자신들이 리비아 정부의 지원을 받는 '투쟁혁명세포'라고 주장했으나 그 외에 그들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는 상태였습니다. 이후 도재승 서기관의 억류상태나 정보에 대해서는 알려진바 없이 8개월 이상의 무의미한 시간들이 흘러가게 됩니다. 당시 정부에서도 도재승 서기관의 귀환을 위해 다양한 방법을 모색은 했지만 실질적으로 영향을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사건에서 도재승 서기관의 귀국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의외로 민간 기업에서 일을 하던 한국인 사업가였습니다. 당시 이 한국인 사업가의 지인 중 중동문제에 어느 정도 전문성과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미국인이 있었고 그를 통해 사건의 실마리를 찾아가게 됩니다. 한국인 사업자인 친구에게 이 일에 대한 전말을 듣게 된 그의 지인은 한국 정부가 얼마나 이 일에 적극적으로 해결의 의지를 가지고 있는지 확인하고자 했고 한국인 사업가는 이 지인을 한국의 외무부에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합니다. 이 미국인은 이후 이 문제의 해결방안을 찾기 위해 유럽으로 가게 되고 유럽 내의 인맥을 통해 레바논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인물을 찾게 됩니다. 다행히 이 과정에서 적당한 인물이 나타났고 이 내용을 가지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미국인은 한국정부가 도재승 서기관의 석방을 위한 몸값을 지불하면 석방이 이루어질 것으로 내용을 전달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도재승 서기관을 구출하는 작전에 합류하는 대신의 조건으로 몇 가지를 내걸게 되는데 이 내용 중에는 당시 미국에 억류되어 있던 미국인질들에 대한 정보들을 도재승 서기관 구출과정에서 함께 입수할 것과 베이루트에서 테러리스트에 의해 죽음을 맞은 미국외교관들의 시신 송환에 대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도재승 서기관의 석방의 대가인 몸값에도 동의하여 작전이 시행되게 됩니다.
도재승 서기관의 몸값은 여러차례로 나뉘어 전달되는 방식을 택했는데 돈이 전달될 때마다 도재승 서기관의 위치를 베이루트를 떠나는 비행기에 가까운 곳으로 이동시키는 방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도 첫 번째 몸값을 시리아 군 대령이 탈취해 가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동시에 베이루트 내에 있던 여러 무장단체들에게 몸값지불에 대한 소식이 퍼지면서 해당 작전 자체가 위험에 빠지기도 합니다. 도재승 서기관을 데리고 있으면 돈을 받는 상황이 되어버리자 여러 단체에서 도재승 서기관을 찾아 나서기 시작하기도 했습니다. 결정적으로 도재승 서기관을 구출하기 위한 작전이 시작된 후 세 번째 날이 되어서 한국이 사건의 해결에 지불하기로 한 돈을 도재승이 한국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지불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게 되기까지 합니다. 당시 정부의 고위급 인사 누구도 이 문제에 대해 해결의 의미를 보이지 않았던 상황, 말 그대로 한국 정부를 믿고 타국의 인질을 구출하는 일에 뛰어든 타국의 인사들에게 한국정부가 엄청난 엿을 먹인 상황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당시는 전두환 정권 시절이었습니다.
다행히 해당 사건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레바논의 사업가가 개인의 사비를 동원해 도재승 서기관의 몸값을 대리(?)지불하게 되고 1987년 10월 26일 도재승 서기관은 석방되어 1987년 11월 3일 귀국하게 됩니다.
2. 도재승 서기관 석방 후 그의 몸값은?
도재승 서기관이 무사히 풀려나게 된 이후 한국 정부는 대통령 선거등의 정치적 상황에 도재승 서기관 석방을 크게 활용합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이 과정에서 일어났던 몸값 미지불에 대한 내용들은 다루지 않거나 혹은 아예 방향을 틀어버리는 방식으로 알려지지 않게 됩니다. 이후 대통령 선거를 통해 노태우 정권이 수립되었지만 이때까지도 타국의 개인사업가가 한국의 외교관을 살리기 위해 지불한 몸값에 대한 정리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정권이 바뀌었으니 노태우 정권과는 상관없는 일이다라는 식의 태도를 취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그를 구하기 위해 지불했던 몸값은 한국이 아닌 타국의 사업가에 의해 절반이 지불되었고 그는 그 돈을 돌려받지 못했습니다. 훗날 인터뷰에 따르면 그는 이 사건 이후 한국정부에 대한 실망과 분노를 느꼈으며 대한민국 정부가 돈이라는 이유로 국가를 위해 일해온 외교관을 희생시킬 수 있다는 태도에 당혹감과 배신감을 느꼈다고 합니다. 다만, 자신의 도움으로 도재승 서기관이 다시 본국에 돌아가 한 가정의 가장으로 삶을 이어갈 수 있었다는 사실에 위안을 얻었다는 말을 남겼다고 전해집니다.
3. 사건 이후 도재승 서기관의 삶
도재승 서기관은 1987년 10월 26일 석방 후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에도 외교무에서 계속 근무를 이어나갔습니다. 다음은 외교부에서의 그의 행보를 정리한 것입니다.
- 1988년 외교안보연구원 연구관
- 1991년 외교통상부 영사과 과장
- 1993년 주 함부르크 총영사관 영사
- 1997년 사우디 아라비아의 주지다 총영사관으로 공관장 첫 부임,
- 1998년 정부의 공사관 폐쇄 방침에 따라 총영사관의 폐쇄로 중도하자
- 1998년 8월부터 2000년 2월까지 주 뭄바이 총영사관 총영사
- 2000년 7월까지 외교통상부 본부대사 후 정년퇴임
그는 정년퇴임 후 서울 서대문로터리 근처에서 검도사업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4. 영화 피랍
영화 피랍의 배경이 되는 이 사건은 생각보다 많은 이슈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시 한국정부의 외교력이 얼마나 부재상태였는지부터, 드라마처럼 나타난 민간인 협상팀, 그리고 국내가 아닌 외국인들의 도움등 그 어떤 사건보다도 영화적인 요소가 많은 사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사건을 살펴보는 과정에서 가장 분노를 느끼게 하는 점은 그를 피랍한 무장단체의 소행이 아니라 바로 한국정부의 태도입니다. 국가를 위해 일하는 공무원이 현장에서 피랍되었으나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이기보다는 계산기를 먼저 두드린 듯한 태고, 그리고 사건 이후에도 해당사건의 책임을 전혀 지지 않은 모습들은 당시의 우리나라 정권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행태를 보였는지에 대한 단면이기도 합니다. 영화 피랍이 어떤 부분에 초점을 맞출지는 알 수 없으나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역사적 사건의 이면이 알려지는 영화이기를 바람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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