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박열은, 실제사건이나 실존인물에서 모티브를 가져와 만들어진 영화들 중에서도 상당한 수준의 역사고증과 작품성을 인정받은 작품 중 하나입니다. 이 영화를 통해 항일운동가이자 아나키스트였던 실제 박열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1. 3.1 운동으로 퇴학을 당한 신문배달 청년
박열은 비교적 매우 진하고 선명한 흔적을 남기는 인생을 살았던 인물입니다. 1902년에 태어나 개인의 자아가 형성되는 대부분의 시절을 일제치하에서 생활해야겠던 그는 3.1 운동과 관련한 사건들로 학교를 퇴학당하고 일본에서 신문배달을 하며 생활을 이어갑니다. 1920년부터 무정부주의 단체인 흑도회를 조직하여 활동하게 되는데 이후 이 조직이 나뉘게 되면서 박열은 조선 최초의 아나키즘 단체로 구분되는 흑로회를 조직합니다. 흑로회라는 조직의 이름은 일본식으로 발음하게 되면 후데이센진 이었는데 이는 당시 일본인들이 조선인 불온분자를 지칭하던 후세이 텐진과 유사해서 만들어진 이름이기도 합니다. 영화 박열에서는 이 조직의 조직원들이 스스로를 후세이 텐진. 우리나라 말로는 불령선인이라를 말로 지칭하기도 합니다.
1932년에는 불령사라는 조직을 만들게 되는데 이 조직이 만들어지면서 박열의 반일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는데 이 시기 이미 연인인 가네코 후미코와 만나던 사이였음은 물론 그의 연인이었던 가네코 후지코 역시 이 불령사의 조직원으로 참여해 항일운동 최전선에 뛰어들기도 합니다. 불령사의 주요 활동은 폭탄테러로 집중되었으며 이후 이 폭탄테러를 위해 중국과 조선을 거처 일본으로 폭탄을 여러차례반입하지만 실패하게 됩니다.

그러던 중1923년 9월 1일 일본 내 사망자가 10만 명에 이르렀던 관동대지진 당시 발생한 관동대학살사건으로 인해 조선인들이 대량학살되자 박열은 이후 잠시 피신하지만 관동대학살의 이유가 되었던 조선인들의 폭동이나 약탈행위의 배후로 지목되면서 체포에 이릅니다.
체포 후 박열을 취조하는 과정에서 박열과 불령사 조직이 폭탄테러를 위해 일본으로 폭탄을 유입하려 했다는 사실들이 밝혀지면서 단순 폭동주도혐의자였던 박열은 천왕 암살 계획을 세운 조직의 주동자로 혐의사실이 변경되었고 이 사건을 바로 대역사건으로 부르게 됩니다. 박열과 가네코 후지는 이 사건의 재판을 통해 1926년 3월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이후 감옥에서 두 사람은 옥중 결혼을 올리기도 합니다. 안타깝게도 박열의 아내 가네코 후지는 1926년 7월 23일 23세의 나이로 옥중 사망하였고 박열은 이후 22년 2개월 동안 복역한 후 해방이 된 이후인 1945년 10월 27일에 석방되었습니다.
2. 영화 박열
이준익 감독의 영화 박열은 비교적 위에 기술된 박열의 삶을 정확하게 그려낸 영화입니다. 주 내용은 박열이 3.1운동 사건과 관련하여 학교에서 퇴학당한 후 일본에서 생활하던 때부터 일본경찰에게 체포된 후의 재판과정들을 보여줍니다. 역사적 고증에 특히 집중하여 만들어낸 작품임을 강조했던 이준익감동의 말처럼 대부분의 상황이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지만 박열이라는 인물이 가진 의외성이나 매력등만으로도 영화적인 흥미와 재미를 모두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사실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한 작품들이 대체적으로 드라마틱한 사건전개의 흥미성은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는 반면, 영화 박열은 그 인물 자체가 주는 독특한 캐릭터의 힘이 엄청났기 때문에 소재의 승리라고도 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강추하는 역사적 사실 기반의 영화이기도 하니 시간이 있으신 분들은 꼭 한번 감상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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