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노예 12년은 제8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각색상, 그리고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작품으로 실존인물인 솔로몬 노섭의 회고록으로 제작된 영화입니다. 실존인물 솔로몬 노섭에게 일어난 12년간의 불행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 자유인 노섭, 납치되다.
영화 노예12년은 남북전쟁이 발발하기 이전, 지역에 제도의 유무가 달랐던 미국 내에서 벌어진 솔로몬 노섭의 납치사건을 영화화한 작품입니다. 솔로몬 노섭은 노예제도가 없는 뉴욕주에서 출생하였습니다. 해방노예신분이었던 아버지는 농장을 소유할 정도로 안정적인 재정상태를 유지하고 있었고 그 정도는 재산에 비례하여 투표권을 주던 당시 해당주의 기준에 부합할 수 있는 수준이었습니다. 솔로몬의 어린 시절은 매우 유복했으며 그에 맞는 상당 수준의 교육과정도 이수할 수 있었습니다. 성장 후 솔로몬은 1829년 결혼하였고 바이올리니스트로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1841년이 되면서 그는 새로운 일거리를 제안받게 되는데 이 일을 마친 후 해당 일을 제안했던 서커스단의 일원이 솔로몬에게 워싱턴 D.C에서 하는 공연도 함께 해주기를 제안합니다.
당시 워싱턴D.C의 경우 노예제도가 운영되고 있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처음 제안을 받은 솔로몬은 이 제안의 수락여부를 두고 꽤 고민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제안받은 임금과 대우가 매우 높았고, 제안한 서커스단에서 그의 안전을 보장해 주었기에 그는 이 제안을 수락합니다. 하지만 이 일을 제안한 이들은 솔로몬에게 약물을 먹인 후 그를 납치하여 노예시장에 팔아넘기게 됩니다. 당시 그를 팔아넘긴 이들이 그 대가로 받은 금액은 650달러였다고 합니다. 이후 그는 노예상인들에 경매에 넘어가게 되고 플랜테이션 농장주에 팔려가 12년간 노예생활을 했습니다.
2. 노예생활 그 이후.
그는 이후 1853년 1월 3일에 이르서서야 노예생활에서 해방될 수 있었으며 이후 12년간의 노예생활동안 겪었던 일들을 엮어 " Twelve Years a Slave (1853)"라는 제목으로 책을 출간했습니다. 이 책에는 노예제도의 부당함과 반인륜적인 행태에 대한 다양한 사례들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당시 노예제도를 반대하던 사회운동가들의 노예제도 반대의 근거로 활용되기도 하였으며 그 자신도 자신이 겪은 이들을 기반으로 노예제도를 반대하는 다양한 사회활동들을 해나갔습니다. 이 때문에 노예제도를 유지하길 원했던 백인우월주의자들의 표적이 되기도 했는데 1857년 이후에는 그에 대한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그가 다시 백인들에 의해 납치된 것이라는 추측도 있었으나 1863년까지는 생존해 있다는 증거가 되는 편지가 남아있으며 죽음에 대해서는 자세히 밝혀진 것이 없습니다.
또한 자신을 노예로 팔아넘긴 이들을 고소하여 재판에 넘겼지만 당시 콜롬비아 특별구법이 노섭이 흑인이라는 이유로 백인에 대한 증언을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혐의는 무혐으로 판결되고 맙니다.
3. 영화 노예12년
영화 노예 12년은 개봉직후부터 영화에 대한 호평이 이어지면서 상업적으로도, 영화적인 의미로도 꽤 괜찮은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국내에서도 해당 영화의 수상을 홍보에 꽤 활용하였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다소 익숙하지 않은 노예제도등을 소재로 했음에도 꽤 괜찮은 흥행을 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이건 제가 직접 극장 가서 본 영화라 그렇게 기억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주인공인 솔로몬 노섭 역의 추이텔 에지오프 이외에도 마이클 패스밴더와 베니딕트 컴퍼배치, 그리고 영화 말미에 등장하여 강렬한 역할을 하는 브래드피트등 출연하는 배우들도 대단한 영화이지만 영화자체만으로도 꽤 훌륭한 영화이니 기회가 되신다면 감상해 보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댓글